SF 작가가
오늘도 논문을 읽는 이유
기초과학이 넓히는 상상의 지평
화학을 전공한 SF 작가에 대한 오해
지금까지 출간한 책 몇몇에 실린 작가 약력은 ‘화학을 전공하였고 SF를 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작가로서 내세울 경력이 부족해 전공까지 들먹이던 신인 시절의 잔재인데, 이 짧고 명쾌한 구절이 때로는 여러 가지 질문을 낳곤 한다. 예컨대 화학 전공자임을 밝혔을 때 가장 흔히 듣는 질문은 “폭탄을 만들 수 있나요?”와 “마약을 만들 수 있나요?”다. 후자의 경우에는 고등학교 교사인 천재 화학자가 가족을 위해 마약 제조에 뛰어든다는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흥행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아무튼 두 질문 모두 답은 ‘아니오’다. 합성 실험에는 언제나 자신이 없었으니까. ‘SF를 쓴다’라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SF 작가 명패를 달고 자리에 나가다 보면 “SF를 쓰려면 꼭 과학을 전공해야 하나요?” 혹은 “전공 지식이 도움이 되나요?”라는 질문을 으레 듣는다. 답 역시 ‘아니오’다. 주변 SF 작가 중에는 이공계 전공자가 아닌 사람도 많고, 내가 한때 외웠던 ‘전공 지식’ 대다수는 연구 현장을 떠난 몇 년 사이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니까. 어차피 SF의 F는 ‘픽션’의 F다. 과학 지식을 아무리 쌓아 놓은들, 그것을 바탕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엮어내기 전까지 SF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야기를 만드는 기술은 연습을 통해 가다듬어야 한다. 그러니 SF 작가가 되고 싶다면 우선 SF를 많이 읽고, 많이 써 보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다면 과학을 공부하며 보낸 시간이 SF 창작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는 말인가? 당연히 그렇지는 않다. SF는 현실의 과학기술을 주요 소재로 삼는 장르인 만큼, 과학기술에 친숙한 사람이 입문하기 쉽다. 내 경우에는 연구 현장에 잠깐 몸담아 본 기억도 도움이 되었다. 과학자나 실험실을 묘사할 때 당시의 경험을 섞어 넣으면 그럴싸한 장면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과 대학원을 거치며 배운 내용 가운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과학 논문을 찾아 읽는 방법이다.
과학자들이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는 순간,
인류에게 허락된 상상의 범위도 그만큼 늘어난다.
그 상상 속에서 누군가는 후속 연구의 주제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해답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다음 SF의 소재를 정할 것이다.
SF 작가는 대체로 과학자보다 조금 더 빨리 상상을 결과물로 바꿀 수 있다.
그럴싸함을 만드는 논문의 힘
SF의 소재가 될 신기한 과학 이야기라면 교양서나 인터넷으로도 접할 수 있고, 그 정도 자료 조사만으로도 소설 한 편을 완성하는 데 지장이 없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어야 할 때가 생긴다. SF는 ‘그럴싸함’이 중요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SF의 상상은 현실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 안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실현할 수 없는 기술, 지구에서는 발견된 적 없는 생명의 형태, 다른 물리법칙까지. 이처럼 낯설고 때로는 터무니없는 요소들을 작중에서는 가능한 것처럼 ‘과학적인’ 것처럼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SF 작가의 일이다. 마음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예컨대 내 첫 번째 단편집 『증명된 사실』의 표제작은 영혼의 존재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설정에 기반한 소설이다. 나는 영혼을 믿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는 만일 영혼이 존재한다면 물리학적으로 어떻게 연구할 수 있을지를 그려 보고자 했다. 하드 SF 앤솔러지 『사랑과 혁명 그리고 퀘스트』에 실은 단편 「마법사 에티올의 트루 엔딩 퀘스트」는 이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고전 RPG의 마법사 캐릭터에 빙의한 주인공이 동료들을 덮칠 비극적 최후의 원인을 파헤치는 의학 미스터리이자, 과학적 그럴싸함에 무게를 둔 하드 SF다. 판타지 게임 속 의료 진단 이야기가 독자에게는 있을 법하게 느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 까다로운 과제를 해결하고자 내가 선택한 수단은 논문 인용이었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내용이라도 실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했음을 강조한다면 제법 그럴싸해 보일 테니까. 무엇보다도 나는 과학 논문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 읽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원하는 논문을 검색해서 내려받는 방법도, 초록과 결론을 먼저 읽어서 개략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방법도, 읽고 있는 논문의 신뢰성을 어림짐작하는 방법도 어디선가 배우지 않으면 알기 힘들다. 다행히도 나는 그 모든 방법을 학교에서 배워 두었기에 다양한 변형 프리온 질환의 진행1), 태즈메이니아데블에게 전염되는 안면암의 기원2), 자포동물의 암세포가 새로운 종으로 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과감한 진화생물학적 가설3)에 이르기까지 소설에 그럴싸함을 더해줄 만한 연구 내용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쟁쟁한 앤솔러지 참여 작가들 사이에서도 어떻게든 하드 SF라고 내세울 만한 소설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덕택이다.
사소한 연구가 열어 주는 이야기의 가능성
물론 그 연구들은 한국의 SF 작가가 원고 마감을 지키는 데 쓰라고 이뤄진 것이 아닐 터이다. GIST가 나 같은 작가를 양성하기 위해 있는 장소가 아니듯이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겨우 70개 가계에서만 발견된 희귀 유전질환, 오로지 태즈메이니아의 특정 유대류만 걸리는 암, 현미경으로 봐야 보이는 무척추동물의 기원 따위를 연구하는 일이 대체 무슨 이득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나만큼은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GIST에서 논문 읽는 법을 배우고 실험실 생활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었을 소설이 있는 것처럼 그런 사소해 보이는 연구가 없었다면 완성할 수 없었을 소설도 있다고. 세계 곳곳의 연구자들이 인류 지식의 지평을 한 뼘씩 넓혀 주었기에 가능했던 상상이 있다고. 연구의 주된 목적은 아닐지언정 그 또한 틀림없는 이득이라고. 당장 소득이 없는 기초과학에 거액을 투자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계 안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 변두리에서 SF를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오늘의 연구 결과가 언제 얼마나 큰 이득을 창출할지 모른다’라는 정석적인 논리보다도 당장 발생하는 부가가치로서의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과학자들이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는 순간, 인류에게 허락된 상상의 범위도 그만큼 늘어난다. 그 상상 속에서 누군가는 후속 연구의 주제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해답을 떠올리며, 누군가는 다음 SF의 소재를 정할 것이다. SF 작가는 대체로 과학자보다 조금 더 빨리 상상을 결과물로 바꿀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오늘도 동남아시아에 서식하는 어떤 바퀴벌레 종의 기묘한 짝짓기 습관에 대한 논문4)을 찾아 읽는 이유다. 이 논문이 언젠가 낳을지도 모르는 막대한 가치와는 무관한, 하지만 틀림없이 흥미진진할 약간의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 Collins S, McLean CA, Masters CL. Gerstmann-Sträussler-Scheinker syndrome, fatal familial insomnia, and kuru: a review of these less common human transmissible spongiform encephalopathies. J Clin Neurosci. 2001 Sep;8(5):387-397. doi: 10.1054/jocn.2001.0919
- Murchison EP, Tovar C, Hsu A, Bender HS, Kheradpour P, Rebbeck CA, Obendorf D, Conlan C, Bahlo M, Blizzard CA, Pyecroft S, Kreiss A, Kellis M, Stark A, Harkins TT, Marshall Graves JA, Woods GM, Hannon GJ, Papenfuss AT. The Tasmanian devil transcriptome reveals Schwann cell origins of a clonally transmissible cancer. Science. 2010 Jan 1;327(5961):84-87. doi: 10.1126/science.1180616
- Panchin AY, Aleoshin VV, Panchin YV. From tumors to species: a SCANDAL hypothesis. Biol Direct. 2019 Jan 23;14(1):3. doi: 10.1186/s13062-019-0233-1. PMID: 30674330; PMCID: PMC6343361.
- Osaki H, Kasuya E. Mutual wing-eating between female and male within mating pairs in wood-feeding cockroach. Ethology. 2021;127:433–437. https://doi.org/10.1111/eth.13133